반복해서 NPC를 타락시킨 끝에 스스로 타락해버린 와우 스토리텔링팀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글의 최초 작성 시점은 2015년 9월인데...

묻어뒀다가 꺼내 먼지를 털어 포스타입 첫 글로 등록합니다.


이건 논문도 아니고 진리도 아닌 그냥 제 생각을 이야기하는 글.

반박 및 다른 이야기 환영입니다.



이야기의 시작



WOW의 군단 확장팩이 발표되던 당시 일리단의 부활이 확정되었었죠.

너무 당황스러워서 정리를 좀 해보려고 했었습니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8년 지난 일리단을 무덤에서 꺼낸 것인지...

그러다 이 글을 발견했었죠.


일리단의 부활이 거듭 회고되는 이유. by 고추장볶음


상당히 많은 부분이 실제 확장팩의 내용으로 공개된 것과 일치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글의 전개가 꽤 깔끔하니 일독을 권합니다만... 읽기 귀찮으신 분들을 위한 3줄 요약도 해보죠.

  • 과거를 가진 캐릭터를 가져와서 블자스럽게 소비하는 것이 블자식 스토리텔링
  • 불성의 일리단은 블자스럽게 소비되지 않았기에 아직 써먹을 구석이 많음.
  • 그러니 일리단은 돌아올 것이다.


하여튼 저 이야기의 관점이 비슷해서 왜 일리단인가를 풀어보려던 노력은 무의미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위에서 왜 이 타이밍에 일리단을 무덤에서 꺼내야 했을 만큼 와우 스토리텔링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글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블자는 타락을 좋아한다.


블리자드가 스토리 진행의 핵심 코드로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타락이라는 사실은 너무 유명해서 이제 네타거리로 삼기도 식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유저들이 또 타락이냐고 투덜대긴 했지만, 와우는 그 타락을 이용해 여러 편의 이야기를 멋지게 끌고 갔었죠.


하지만, 다른 게임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보였던 그들의 스토리텔링이 시간이 지나면서 묘하게 불안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드레노어의 대군주에서 용두사미의 전형을 보여주며 일리단을 꺼내 빠르게 군단으로 전환을 선택했죠.


온라인 게임 스토리가 터지는 것이 하루 이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블리자드잖아요? 그들은 스토리팀을 따로 운영할 정도로 그 쪽에 많은 비용을 쏟고 있는 회사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회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터졌단 말이에요.


이게 도대체 왜 터졌을까? 이 고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재미있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타락이라는 주제는 처음부터 MMORPG의 스토리텔링 방식과에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단 스토리텔러의 관점에서 타락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죠.



타락의 특징


캐릭터의 타락은 원체 자주 사용되다 보니 요즘은 일종의 클리셰 취급을 받습니다만 실제로는 아주 입체적인 캐릭터의 유형으로 다루기 까다롭고 허점을 만들기 쉬운 기믹입니다.



1. 타락은 반전 매력이다.


우선 타락은 반전 매력입니다. 반전은 특정 순간을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지면서 보는 사람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상황을 연출해서 재미를 주는 기법입니다.

따라서 반전의 결과가 타락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앞에는 깨끗하고 영광스러운 과거가 있어야 합니다.



2.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과거를 필요로 한다.


‘깨끗하고 영광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라는 한 줄의 설명 이후 ‘그리고 그가 타락했다.’ 라는 전개가 진행되었을 때 그것을 충격적인 반전이라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타락하는 캐릭터의 과거는 반드시 유저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확고한 것이어야 합니다. 유저와 함께 했다면 최고고 다른 방식으로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해도 유저에게 인지도가 높을수록 공감하는 유저가 많을수록 효율이 높아지죠.



3. 설득력 있는 이유를 필요로 한다.


최고의 반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반전입니다. 그 다음은 예상할 수 있었으며 납득할 수 있는 반전으로 이 정도만 되어도 대중매체용으로는 괜찮은 스토리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적당히 예상 가능한 것이 더 좋기도 하니까요.


뭐 그 외의 예상하지 못했지만 납득할 수 없는 반전과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납득할 수 없는 반전은 뭐가 더 나쁜지 100분 토론이 필요한 수준이라고 보니 치워놓고...


예상을 하든 못하든 반전은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 필요합니다. 특히 타락은 캐릭터의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기에 더욱 신중하게 다뤄야 하죠. 공들여 만든 캐릭터에게는 팬이 존재하고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납득 불가능한 이유로 소비되면 크게 분노합니다.



4. 타락은 지속되기 어렵다.


타락은 상태의 변환입니다. 그것도 정 반대로의 격한 변환이지요. 이런 캐릭터의 변환은 그때까지 들인 비용들을 모두 사용해서 강렬하게 불태우는 것과 같기에 그 캐릭터가 가진 이야기의 가능성을 빠르게 소진시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소모된 캐릭터는 하얗게 불태운 후 영원히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극히 일부의 캐릭터만이 다른 이야기를 통해 운 좋게 기회를 얻어 얼굴을 내밀고, 더 일부의 캐릭터는 완전한 재기에 성공하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의 경우 타락은 가능성을 소모시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락은 이렇게나 난이도 있는 기믹이지만 어쨌든 와우 초반에는 그런 복잡한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면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통해서 선행스토리텔링이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였거든요.

  1. 워크래프트 시리즈를 통해 제공되었던 압축된 시간적 경험을 가진 유저들이 많았기에 웬만한 캐릭터들의 과거는 다 이해하고 납득되고 있었습니다.
  2. 그리고 그 과거는 일방통행형 이야기였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았죠.
  3. 하도 많이 쓰다보니 식상했을 뿐, 타락 자체는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전개되었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죠.
  4. 지속되기는 어렵지만 재료가 아주 많았습니다. 준비된 캐릭터들은 아주 많았으니까요.



그러나...



캐릭터가 부족하고... 진영이 무너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준비된 이야기의 도구들은 소진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끌고 가려면 도구들이 계속해서 공급되어야 하죠.

하지만 예상과 달리 도구의 공급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공급의 수단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지금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하는 워크래프트4의 등장이 있고요.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영화 등의 미디어믹스를 통해서 전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바로 와우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의 재생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와우 안에서 재생산을 통해 메인 시나리오를 진행시키는 시도를 했죠.


가로쉬는 불타는 성전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로 리치왕과 대격변을 거치며 호드의 수장으로 떠올라 판다리아에서 타락을 통해 최종적으로 소비된 캐릭터입니다.


그런 가로쉬 스토리는 무려 7년에 걸친 스토리텔링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로쉬 스토리가 성공적인 훌륭한 이야기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죠.


아니 7년 동안 공들인 이야기면 모든 이가 탄복할 멋진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7년 동안 매 년 다른 이야기를 해서 하나만 히트 쳐도 그거 성공 아닌가?

왜 7년이나 공을 들였지? 앞으로도 7년이나 공을 들여야 하나?


이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마다 답이 다를 겁니다. 그래서 무엇이 옳으냐가 아닌, 왜 어려운가에 대해서 게임기획자의 관점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게임에서 긴 스토리텔링을 하면 말이 많은가?

정리해 놓고 보니 그 이유가 아래와 같이 요약되더군요.

  •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유저의 연속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 라이브 뷰잉 위주다 보니 전달 과정에서 분산과 손실이 생긴다.
  • 게임의 시간이 연속적이라서 스토리텔링의 효율이 매우 나쁘다.



1. 유저가 바뀐다.


가장 큰 이유는 유저가 바뀐다는 거죠.

신규 유저는 계속해서 들어옵니다. 중간에 쉬었던 사람도 돌아옵니다.


와우가 벌써 10년이 되었는데 지금 시작하는 신규 유저가 워크의 스토리를 알까요?

안다고 해도 당시에 했던 경험과 같을까요?


중간에 확장팩 하나 건너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지금 다시 해당 지역을 플레이하면 과거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게 되나요?


와우의 스토리텔링 방식은 시간적 깊이에 의존하고 이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만, 그걸 보는 유저의 플레이는 불연속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이가 모든 과거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타락은 진행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불성에서 가로쉬의 과거를 아는 유저와 모르는 유저는 판다에서 가로쉬의 타락을 보는 관점이 완전 달라집니다. 하지만 지금 불성에서 렙업을 하면 가로쉬의 과거를 보기 전에 레벨업을 마치고 리분으로 넘어가게 되죠. 아예 점핑을 한 케이스도 있을 수 있고요. 오리 시절 티리온 폴드링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그 캐릭터를 보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퀘는 남아있지 않죠.


딜레마가 시작되었습니다. 앞선 정보가 많이 사용될수록 이야기는 강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연속성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입니다. 하지만 소비자가 가진 정보는 개인마다 다 다르고 모르는 정보가 사용되면 소비자는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도 10년 정도 하면 다 그런 거 아니냐고요? 아뇨. 여기서 온라인게임과 다른 미디어 매체의 가장 큰 차이가 등장하는데...




2. 라이브 뷰잉이 최고다.


집단소비 정도로 불러야 할까요? 공유경험이 중심이 되는 컨텐츠 소비를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온라인게임은 실시간으로 집단에게 제공되고 소비됩니다. 그리고 그 소비에 의해 변화를 만듭니다. 한 번 변화가 진행되고 나면 이전의 버전을 플레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기에 처음 진행될 당시의 경험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죠. 게다가 그 경험은 집단과 공유되는 과정에서 서로서로 영향을 받습니다.


대하 장편 소설은 읽으면 됩니다. 시즌이 10개쯤 되는 드라마도 다 보면 됩니다. 웬만한 경우 10년 전에 접한 사람과 지금 접한 사람의 경험은 거의 유사할 겁니다.


온라인 게임이요? 서버를 구하는 것도 일이지만 수십 수백 수천의 유저를 모으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죠. 그런데 심지어 그걸 반복한다고 이전과 같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습니다. 이거 정말 난감하다 이겁니다.


이걸 디자이너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보니 나름 방안을 강구합니다. 책! 영화! 애니메이션! 등등등! 이것의 목적이 덕질과 추억팔이에만 있는 건 아니죠.


제각기 흩어져 있는 과거의 경험을 하나로 통일하고 정리하기 위한 방법중에 하나입니다. 마침 이 글을 묵혀놓는 사이에 크로니클이 발간되어서 여기에 약간의 설득력이 더해졌네요.


자... 그럼 그렇게 열심히 과거의 기록을 정리하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3. 세계의 시간축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직 새로운 것을 넣는 과정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게임의 시간은 연속적이라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문제죠.


자. 반역 누명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가 10년에 걸쳐 복수의 칼을 갈기로 했다고 합시다.

이 10년의 세월이 소설에서는 10권일 수도 있지만, 한 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에서는 게임 안의 10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게임 안의 10년을 보내는 과정에서 개발팀에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개발팀 인원이 대거 교체될 수도 있고, 회사의 개발 철학이 바뀔 수도 있고,  유저들이 속한 사회가 준비한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지요.


복잡한 캐릭터 하나를 만들기 위해 기껏 준비한 것들이 묵히는 사이에 손실될 수 있다면 그럼 도대체 십년지대계를 몇 개 준비해야 진짜 10년 후를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요?




이야기가 길었으니 요약을 해 볼까요.

  • 온라인 게임은 하나의 시간축을 바탕으로 고정된 하나의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 유저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그 안의 관점과 자신만의 불연속적인 패턴으로 이야기를 소비하며
  • 대부분의 경우 재소비는 의미가 없다.


이런 상태니까 복잡한 이야기를 하면 유저들에게 각기 복잡한 관점이 생길수밖에 없지요. 대부분의 사회현상이 그렇듯이 말이에요.




그래서 대안은?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그나마 연속성이 보장되는 단일 확장팩 내에서 액자구성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블자는 대격변 이후로 각 지역에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을 해왔었는데, 조금 스케일을 키우는 겁니다.


하나의 확장팩을 상징하는 신규 캐릭터를 넣고, 그 캐릭터를 중심으로 다른 인물들을 조합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거죠.


뭐... 이것 역시 블자가 시도했었습니다. 드군의 이렐은 해당 확장팩에서 혜성같이 등장해서 주인공과 함께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주연급으로 올라설 기미를 보여서 매우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는데... 드군과 함께 그냥 흐지부지되어버렸지요. 개인적으로는 매우 아쉬웠습니다.


다음 확팩에서는 그런 NPC가 나오기를… 이왕이면 NPC 기능이 강화된다고 하는 추종자가 그런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지만... 일리단이 중심이 되어버린 이상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PS.


정리해 놓고 보니…

“캐릭터 중심의 온라인 게임 스토리텔링이 갖는 한계점”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네요.


Q: 님. 언제는 NDC에서 온라인 게임 스토리텔링은 캐릭터 중심으로 하는 것이 최고라면서요?

A: ㅇㅇ

Q: 근데 캐릭터 중심의 한계라니 뭔 소리임?

A: 그러니까 그 때도 얄팍한 속성형 캐릭터를 넣고 소비하는 것을 반복하라고 했었음.


칼보라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